[나는 양평인이다 #22] 토종씨앗 나누는 두 사도 ‘엠마와 야고보’
[나는 양평인이다 #22] 토종씨앗 나누는 두 사도 ‘엠마와 야고보’
  • 김현옥
  • 승인 2021.02.05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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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씨앗 보존의 성지 ‘용문 나자렛수녀원’을 찾아서
'용문나자렛집' 엠마 수녀(좌)와 야고보 수녀(우)
'용문나자렛집' 엠마 수녀(좌)와 야고보 수녀(우)

[양평=경강일보] 김현옥 기자 = 고려시대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왔던 목화씨는 우리나라 의복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1950년대 까지 섬유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미국산 코튼(면)이 들어오면서 자취를 감췄다. 현재 국내에서 재배하는 무 배추 고추 씨앗의 50% 이상은 다국적기업, 양파 당근 토마토 씨앗은 일본산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토종씨앗 수천 종이 나라 밖으로 유출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 들녘에서 간간히 봤던 밀밭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실제 2019년 기준 우리나라 밀 자급률은 0.5%에 불과하다.

밥보다는 빵과 면을 선호하는 식생활 문화의 변화에 따라 국민건강은 물론 식량안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씨앗전쟁’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국적 곡물회사의 이익 아래 종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되면서 ‘토종씨앗’을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용문면 ‘나자렛수녀원’ 엠마 수녀는 2014년부터 양평에서 ‘토종을 이용한 생태 사도직’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 중이다. 지난해에는 시흥에서 8년 동안 포도농사를 지으며 ‘과수 사도직’을 해온 야고보 수녀가 합류해 토종씨앗을 살리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나자렛수녀원 내 2,000평에 이르는 땅이 이들의 일터다. 농번기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시간을 빼놓고 텃밭에서 일을 한다. 1,000평 가량 땅에 우리가 계절별로 먹는 작물은 거의 다 심었다. 콩, 배추, 무, 토마토, 양파, 파, 호박, 참외, 우엉, 시금치, 근대, 부추, 상추 등 30여 가지 작물에 종의 수만도 200여 가지에 달한다.

농사를 지어보니 개량종은 발아가 잘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종자회사에서 여기저기 좋은 성질만 모아서 ‘한 해 농사용’으로 씨앗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가령 상추만 봐도 시중에서 많이 유통되는 개량종은 두께가 얇고 맛과 향이 떨어지는데다 씨도 잘 안 생긴다.

나자렛수녀원 안 1,000평 땅에 심은 갖가지 토종작물
나자렛수녀원 안 1,000평 땅에 심은 갖가지 토종작물

반면 토종 상추는 육질이 두껍고 아삭한 맛이 일품이다. 거기다 병충해에도 강하고 씨앗도 많이 달린다. 실제 상추를 자르면 락토신으로 불리는 하얀 즙이 월등히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골 어르신들이 토종 작물을 키워서 가족들의 밥상에 올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증거다.

엠마수녀는 2014년 양평에 오자마자 가톨릭농부학교에서 상추와 옥수수 토종씨앗을 얻어왔다. 이후 홍성군 풀무학교에서 고추, 파, 근대 등 5가지 씨앗을 받아서 심었다. 그 해 옥수수는 튼실하게 열매를 맺었고, 해마다 형질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개량종은 첫해에는 수확이 많은데 다음해부터 눈에 띄게 수확이 줄어들고, 형질이 변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자신감을 가지고 민간단체인 ‘토종 씨드림’을 통해 더 많은 종자를 가져다 심고 채종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렇게 직접 농사를 짓다 보니 마트에 갈 일이 거의 없다. 제철 토종음식이 식탁에 오르고, 말려놓은 호박, 고추, 가지, 고구마, 토란, 취나물, 시래기 등으로 겨우내 먹는다.

흔히 토종씨앗이 아주 고대로부터 우리민족의 밥상에 오른 작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30년 이상 씨앗을 받아 증식을 하고, 우리 토양과 기후에 적응했으면 토종으로 친다. 대략 한 세대에 걸쳐 이어온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중에서 콩류(콩, 팥, 녹두 등)는 삼국시대부터 재배한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가 원산지라고 말할 수 있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외침을 많이 받아 “씨앗은 배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얼마 전 엠마수녀가 만난 70대 박사는 “한국전쟁 중 씨앗이 든 전대를 허리에 매고 피난을 가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토종씨앗을 연구하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토종씨앗은 단순한 작물 이상의 생명과도 같은 신성한 존재였다.

엠마수녀는 지난 2018년 7월부터 11월까지 5개월 동안 14회에 걸쳐 양평군 동부지역 6개면 24개 리를 토종씨드림 회원과 같이 방문해 씨앗을 수집했다. 마을주민들이 혹시 ‘성당 다니라고 오해할 까봐’ 동행한 수녀와 함께 사복을 입고 비밀리에(?) 움직였다. 장마에 폭염으로 힘든 여정이었지만, 양평군에서 총 38 작물, 67 품종, 198점의 씨앗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는 ‘2018 양평군 토종씨앗 수집보고서’로 오롯이 담기게 됐다.

지난해 열린 토종씨앗 나눔행사
지난해 열린 토종씨앗 나눔행사

지난해 7월에는 30여 명이 뜻을 모아 '양평군 토종씨앗보존연구회’를 만들어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씨앗과 모종 나눔 활동을 하고 있다. 작년 코로나19로 모임을 제대로 못하다 2월 9일 양평군농업기술센터에서 올해 첫 회의를 연다. 여기서 올 토종씨앗 보존과 나눔을 위한 활동계획을 짜고, 토종작물 정보 등을 교환할 예정이다.

나자렛수녀원에서는 씨앗은 무료로 나눔하고, 모종은 판매가 원칙이다. 또한 토종씨앗 나눔은 나누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람이 잘 키워서 주변에 확산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엠마와 야고보 수녀는 사과참외 씨앗을 가져가신 분이 더 많은 씨앗을 채종해서 왔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입을 모은다.

야고보 수녀는 “땅을 살리려면 토종씨앗을 많이 심어야 하고, 자손대대로 후대에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당장 눈 앞의 이익을 좇는 농사 대신 미래의 지속가능한 생태농업과 식량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씨앗에 대한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

엠마 수녀는 “토종작물은 맛도 좋지만 무꽃, 감자꽃, 당근꽃 등 예쁜 꽃을 보고 있으면 경외심이 든다”며 “친환경특구인 양평이 토종씨앗 보존과 확산의 성지로서 역할을 하도록 앞으로도 더 열심히 활동할 것”이라고 전했다.

<나자렛집 이모저모>

토종씨앗은 무료나눔하고 모종은 판매한다
토종씨앗은 무료나눔하고 모종은 판매한다
토종 사과참외와 배꼽참외
토종 사과참외와 배꼽참외
노랗게 봉우리를 올린 토종 배추꽃
노랗게 봉우리를 올린 토종 배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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