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벼에 비추는 따스한 햇볕처럼
쓰러진 벼에 비추는 따스한 햇볕처럼
  • 김현옥
  • 승인 2019.09.19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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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도소 논산지소 ‘시집가는 길에서 만나는 가족’ 강연 후기
시골집에서 바라본 가을 들녘
시골집에서 바라본 가을 들녘

[논산=경강일보] 김현옥 기자 = 추석이 지난 들녘,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닥친 태풍으로 여기저기 누운 벼를 이제는 아무도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농촌 고령화로 일할 사람이 없어서 거의 모든 논을 기업농을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서다.

김제평야가 고향인 나는 어렸을 적 태풍에 쓰러진 벼들을 아버지와 함께 한 움큼씩 묶어주곤 했다. 땅에 떨어지고 썩어가는 한 톨의 쌀이라도 건지려는 마음에서다. 벼를 묶다 보면 웅덩이에서 우렁이나 미꾸라지를 덤으로 얻기도 했다.

팔순이 지난 어머니를 뵙고 대전교도소 논산지소로 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재소자들에게 ‘시집가는 길에서 만나는 가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성교육 차원에서 진행된 강연이었지만, 쓰러진 벼에 따사로운 햇볕을 비춰주고 싶은 마음에서 자청했다.

85년 가두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에서 밤새 죽도록 맞은 후, 유치장에서 후배가 불러준 ‘서해에서’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셨던 얘기. 86년 2.4서울대연합시위로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8월에 상계동철거반대시위로 구속돼 그 해 초겨울에 집행유예로 석방된 개인사를 들려줬다.

좌절감에 쌓여 ‘내 인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때를 회상하니 나이 겨우 만 20세였다. 또 전투경찰로 모교에 가서 시위를 막고, 제대 말년 백담사에서 전 대통령 경비를 했으니 사람의 앞날은 알 수가 없다는 말이 맞는 듯 하다.

복학을 하고 취직과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다 음주운전으로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차를 팔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서 읽게 된 시가 삶의 위안이 됐다. 세상에 시를 잘 쓰는 시인이 이렇게 많은 줄은 정말 몰랐다.

수용자 종합문예지 '새길' 표지
수용자 종합문예지 '새길' 표지

이렇게 시를 만나다 보니 계절별로 읽기 좋은 시집이 정리가 됐다. 거기에 사랑(봄), 부부(여름), 아버지(가을), 어머니(겨울) 등 가족을 하나씩 넣어 <시집가는 길에서 만나는 가족>이 탄생했다. 이번에는 9편의 시를 골랐다.

윤제림, 이정록, 복효근, 함민복, 박철, 고영민, 문태준, 공광규, 나희덕, 장석남, 이윤학, 고두현 시인의 시를 강연에서 소개했다. 재소자에게는 조금 어려운 시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9편의 시를 같이 읽고 나서 마지막 열 번째 시의 주인공은 여러분이었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 나만 옳다고 생각했던 시절, 세상에 대한 분노, 잘못된 결과에 대해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옳다”는 결론을 얻기까지 50년이 넘게 걸렸다는 얘기도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루한 강연에 함께 호흡을 해주고 귀를 기울여준 재소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내 젊은 시절 신념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었지만, 재소자들의 신념은 ‘가족’이었으면 한다. 가족이 없다면 시를 읽는 마음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람이었으면 더 좋겠다.

그런 마음 그대로 간직해서 출소하게 되면 시집 몇 권을 끼고 정동진을 오가는 동해열차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라고 했다. 유자향 가득한 남해 다랑이마을에서 하룻밤 꼭 묶으시라고도 했다. 나와 눈맞춤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분들은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는 믿음이다.

대전교도소 논산지소
대전교도소 논산지소

손택수 시인의 ‘호랑이 발자국’처럼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 사회에 나가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강사에게 ‘안동역에서’를 부르게 해준 재소자들, 강연을 도와주신 대전교도소 논산지소 김종혁 교도관님, 건양대 최문기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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