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편지 #2] 가을, 늦게 온 편지같은 당신
[자서전편지 #2] 가을, 늦게 온 편지같은 당신
  • 김현옥 기자
  • 승인 2021.09.13 1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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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폭염이 가시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한낮에는 여전히 따가운 햇살이 내려쬐지만, 그 속에서 고추가 익고 밤이 단단해지고 벼가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사람의 인생으로 치면 중년기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동안 뿌려놓은 씨앗을 수확하는 단계죠. 누구는 풍성한 수확을 얻지만, 또 누구는 빈 알갱미만 얻기도 합니다. 똑 같은 노력을 했어도 결과가 다를 수 있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지금 풍부한 결실을 맺었다고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또 빈약한 결과를 얻었다고 자책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많이 얻은 사람은 그것을 나누고, 적게 얻은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약하면 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정말 늦게 온 편지처럼 찾아온 멋진 인생의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시는 가을의 길목에서 감상하면 참 좋은 고두현 시인의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입니다.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경상남도 남해시 물미해안에 드는 가을을 낭창낭창하게 잘 묘사한 시입니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리 해안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 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드는 거 좀 보아요.

 

가을이면 해풍으로 잘 익은 남해산 유자 같은 시큰한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두세요. 그리고선 누군가에게 편지를 띄우는 것은 어떤가요. 그 마음 읽고 단풍처럼 빨갛게 물드는 사람들의 볼을 보고 싶지 않은가요. 여름이 뜨거웠으므로 가을은 더욱 찬란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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