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편지 #22] 소주도 언다는 어린이 추위
[자서전 편지 #22] 소주도 언다는 어린이 추위
  • 김현옥 기자
  • 승인 2021.12.03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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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 오늘이 제가 머리를 빡빡 깎고 훈련소에 입대하던 날입니다. 짙눈개비가 내리는 날 동네 모정을 돌아나오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하염없이 저를 바라보고 계셨죠. 눈물인지 눈의 물인지 모를 것들이 뒤섞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나이 스물 하나였는데 늦은 군대를 간다고 생각해 앞이 캄캄했습니다. 동네 친구 성희가 동행해서 버스를 타고 전주 35사단에 입대를 했죠. 사복을 집으로 보내는 편에 부모님 앞으로 편지도 한 통 부친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들의 옷과 편지를 받은 부모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훈련소 생활은 추웠다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입대 바로 일주일 전에 대한항공 폭파사건이 있어서 부대 경비가 강화되고, 현역병들은 매일 충정훈련을 하고 있었죠. 제일 힘들었던 것은 새벽에 일어나 동초 근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몸 중에서 가장 추위는 타는 곳은 손과 발입니다. 심장에서 멀어질수록 피가 도는데 오래 걸리니 그런 것 같습니다. 손은 비비거나 겨드랑이에 끼거나 호호 불면 되는데, 발은 고작해야 한발로 다른 발을 눌러서 지압해 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간밤에 예고에 없는 눈비가 내려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언제 이 겨울이 가나 싶지만, 또 지나다 보면 추위에 익숙해지는 것이 사람 사는 일입니다. 이동순 시인이 비둘기처럼 구구 거리면서 추위를 이겨내자고 다독이고 있네요.


구구 추위

                                    이동순

아흐레씩
아홉 번만 지나면
이 혹독한 겨울 금방 지나가지요
앞의 세번은 어린이 추위
소주도 얼어요
덜덜 떠는 가축 등엔 이불 덮어주어요
두려워요 양의 우리도
점점 얼어붙네요
가운데 세 번은 젊은이 추위
서너 살배기 소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온 세상 무섭게 얼어요
하지만 여기까지가 고비지요
햇살 점점 달라져요
곡식은 이제 얼지 않네요
술 취해 초원에 그대로 쓰러져도
얼어 죽는 일 없어요
아, 드디어
마지막 세 번
늙은이 추위로군요
언덕마루에 눈 녹아 막혔던 길 트이고
따신 햇볕에 나뭇잎 움트고
꽃도 피어나네요
드디어 마지막 아흐레
마음 따뜻해지고
행복이 벙글벙글 웃으며
찾아오네요


이제 소주도 언다는 어린이 추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겨울은 가난한 자들에게 시련의 계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줄 오리털이불 같은 12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함께 구구단을 외듯 겨울을 나면 어느새 남녘에서 매화꽃 벙근다는 소식이 들려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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