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편지 #25] 대보름날 품는 '대장부의 기상'
[자서전편지 #25] 대보름날 품는 '대장부의 기상'
  • 김현옥 기자
  • 승인 2022.02.12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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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첩
하피첩

"보름날 약밥을 지어 먹고 차례를 지내는 것은 신라 때의 풍속이라. 지난해에 캐어 말린 산나물을 삶아서 무쳐 내니 고기 맛과 바꾸겠는가? 귀 밝으라고 마시는 약술이며, 부스럼 삭으라고 먹는 생밤이라. 먼저 불러서 더위팔기와 달맞이 횃불놀이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풍속이요 아이들 놀이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중 정월 대보름 풍속에 관한 노래입니다. 아마 학교 다니면서 국어시간에 한 번쯤 읽어봤을 만한 구절입니다.

보름날 약밥을 먹는 것이 신라 때 일이라니 천년이 넘은 풍속이네요. 나이가 드신 분들은 대보름날 동네 어귀에서 친구가 오길 기다렸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 더위!" 하며 더위를 팔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깡통에 솔방울을 잔뜩 넣고 돌리던 불놀이도 아주 신이 났었죠.

며칠 지나면 정월 대보름입니다. 보름이 지나면 골짜기에 얼었던 냇물도 녹고, 남녘에서는 봄소식이 들려옵니다. 겨우내 구들장에 붙어있던 엉덩이가 근질근질 해 이른 봄나들이를 하기 좋은 때이죠. 송수권 시인이 서둘러 화개장터로 나가시는군요.

“며칠 째 쌓이던 눈이/다시 녹으면서/대성동 마을 움집들의 추녀끝을 둘러/고드름발을 쳤다.//우리 고숙은/삼동내 눈사태 속을 흐르는/물소리도 싫어지고/마른 산약 뿌리를 다듬으며/달장깐이나 막힌 화개장길이 못내 서운타.//지리산을 겉돌면서 살아 온/고숙의 한평생/이 봄은 심메마니 어린 싹이라도 볼까//삼동 허연 꿈속에서도 만나지는 떡애기./아장아장 걸어오는 부리시리 산삼/한 뿌리라도 만나질까./유마경 한 구절 같은 햇빛 하나가//고드름발에 엉기면서/지리산 일대의 산봉우리들을/거느리고 왔다.//산맥들이 풀리면서 돌아가는/엇둘 엇둘 소리......”(‘화개장길’ 중)

이월은 삼동의 지리산 골짝에서 지혜와 방편의 유마경을 읽으면 딱 좋겠군요. 거기다 화개장 가는 길에 애기 산삼이라도 한 뿌리 건져올리면 로또에 당첨되는 거겠죠. 그보다 산천의 얼음이 풀리면서 들리는 계곡 물소리가 사람 사는 맛을 더하게 해줄 것입니다.

다시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서 평생을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살다 간 다산을 생각해봅니다. 여기저기 귀양을 다니다 늙으막에 남양주 고향집에 와서 건 편액이 '여유당'이었습니다. 당쟁에 시달린 자신과는 다르게 "차가운 강물을 건너듯 매사에 조심하며 살라"는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히 살되 응당 해야할 일이라면 차가운 물이 뼛속을 관통할 지라도 강물을 건너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피첩에 써서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 끼를 배불리 먹으면 살이 찌고 한 끼를 굶으면
마르는 것은 천한 짐승에게나 어울린다.
시야가 좁은 사람은 오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바로 눈물을 흘리고
다음 날 일이 뜻대로 되면 금새 아이처럼 표정이 밝아진다.
근심과 즐거운, 기쁨과 슬픔, 감동과 분노, 사랑과 증오,
온갖 감정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니 달관한 사람들에겐
그 모습이 얼마니 한심하게 보이겠느냐?
아침에 햇빛을 받는 쪽은 저녁에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핀 꽃은 먼저 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운명의 수레는 재빨리 구르며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 점을 기억하고 세상에 뜻이 있으면
잠간 재난을 이기지 못해 청운의 뜻까지 꺾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대장부는 언제나 가을 매가 하늘 높이 오르는 기상을
가슴에 품고 있어 천지가 좁아 보이고
우주도 내 손안에 있는 듯 가벼이 여겨야 한다.


화살처럼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어영구영 하다 보면 십년 세월이 하루입니다. 주변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대보름날 꽉 찬 달을 보면서 매의 기상을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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