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편지 #26] 우숫날 동백숲 길을 걷다
[자서전 편지 #26] 우숫날 동백숲 길을 걷다
  • 김현옥 기자
  • 승인 2022.02.19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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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둥그런 나물통은 스님 밥자리 따르고, 볼품없는 책상자 나그네 행장일세. 어느 곳 청산인들 거주하지 못할쏘냐. 한림원의 봄꿈이야 이미 아득하구나.”(정약용 ‘題寶恩山房’중에서)

다산이 오랜 고생 끝에 당대의 학승 아암을 만나 책을 가까이 하게 된 기쁨이 녹녹하게 배어있는 시입니다. 다산은 백련사 뒤에 있는 자그마한 산이요, 백련사 뒤에는 동백숲이 있는데 동백꽃의 다른 이름이 산다화(山茶花)인 것을 보면, 다산과 백련사와 동백꽃은 참으로 묘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운명의 끈을 따라 오늘 김선태 시인의 <동백숲에 길을 묻다>(세계사)를 읽어봅니다. 200여 년 전 강진으로 길을 한번 떠나볼까요.

나주읍 밤남정에서 형님 정약전과 이별을 하고, 눈물이 말라 소금이 되어 툭툭 떨어질 때쯤 다산이 도착한 곳이 월출산 자락 어느 마을입니다.

달과 산, 달과 골짝, 달과 나무, 달과 바위
그리고 달과 들이 저렇게나 평화롭게 만나는
만나선 이름마다 그대로 휘황한 풍광이 되는
이 눈물겨운 마을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자연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때문이다
-‘月자 마을에 가서’ 중

흑산도로 약전 형님을 떠나보낸 날이 11월말이었으니, 계절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강진에 거처를 마련한 다산이 ‘세한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비틀비틀 따라온 길이 하나 가파르게 집에 닿는다
외모진 바다 기슭, 집은 그렇게 엎드려 있다
......
솔가지 꺾어 아궁이 불 지필 때 나는 저녁연기
......
거기 공복의 쓰린 희망 하나 단정하게 누워 있다
......
불을 끄고 마음도 끄니 세상이 한없이 넉넉하다
밤새 파도가 물어뜯는지 바다 기슭이 온통 아프다
지극하구나, 상처를 사납게 읽고 가는 저 바람소리
여기까지 와서야 나는 세상을 다시 본다
-‘세한도’ 중

추사도 그랬지만 풍파를 다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는가 봅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막 우려낸 작설차처럼 온기가 도는 정을 나눈 사람이 아암 혜장선사였습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생각해보면, 산길은 산의 마음을 따라가는데 나는 무엇을 좇아 어디를 아수라장 헤매었던 걸까요 계곡 물소리는 산의 중심을 깨우며 아래로 흐르는데 나는 또 삶의 어느 주변만을 맴돌다 위로 눈길을 흘렸던가요...... 길섶에 앉아 쉬자니 문득 꽃들이 말을 붙여옵니다 네게도 언제 오솔길이 있었던가, 마음의 뒤란을 휘어도는, 그런 포렴한 오솔길 하나 있었던가 묻습니다”-‘백련사 오솔길에 들다’ 중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던가요. 물따라 길따라 남으로 남으로 흘러든 동백숲에서 상처를 이기고 환한 등불로 피어난 동백들의 난장을 봅니다.

“백련사 동백숲은 대낮에도 어둡다......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동백들. 가지가 부러지고 잘릴 때마다 수액으로 둥그렇게 감싸고선 다시 길을 간다...... 무수한 길들이 서로 촘 촘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가지의 끝. 그 길의 정점에서 비로소 피는 동백꽃을 보라...... 그 수만 송이의 꽃불들로, 생살을 찢고 나오는 열혈로, 추위 쟁쟁한 강진의 하늘 한쪽이 아연 뜨겁다”(‘백련사 동백숲3’ 중)

웜마 뜨거운 거 잉. 동백에 불붙은 몸을 강진만에 던져 건너편으로 헤엄치니, 마음의 불을 꺼주는 정수사(淨水寺)입니다.

“정수사 깊숙이 꼬부라져 들어간 길목에 서 있었습니다...... 삶이 무어라고 말하면 이미 삶은 거기에 없었다는 듯, 풍경 하나를 제대로 만나려면 그 풍경과 몸을 바꾸어야 한다는 듯,......//...... 어슴어슴 저녁이 내리고 산 어깻죽지 위로 달이 뜨더니 소복한 산길이 하나 술 취한 듯 비틀비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절간의 넉넉한 고요 속으로 콩알만한 마음이 들어가 자리를 펴고 누웠습니다.”-정수사 가는 길’ 중

동백화마(冬柏火魔)에 강진수마(康津水魔)에 놀랜 마음, 정수사에서 늙은 대처승과 하룻밤을 보내니 한결 낫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천태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앞으로는 완도요 오른쪽엔 진도라. 저 멀리 진도에서는 막걸리 추렴에 육자배기 자락이 구성지게 들려오고, 그 둥글고 둥근 목소리에 완도 정도리 바닷가 몽돌들은 제 몸을 부비며 화답합니다.

동백숲에 길을 물으니, 남도의 바다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가장 몸이 가벼운 것들이 바다 깊숙이 유영하리라.”

오늘은 눈이 녹는다는 우수입니다. 어제 학교 동기가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학교 선배의 아내가 되어서 10여 년 전 무주에 치킨 한마리 들고 놀러갔었는데, 말 없이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여승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백숲 길을 마냥 걷고 싶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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